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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빈곤 글로벌 지도

3-4. 킨토세, 레파르티미엔토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은제련 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했는지

킨토세와 레파르티미엔토라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배를 위한 제도를 볼거임

 

스페인의 총, 병원균의 학살로 건강한 사람은 없었고

포토시는 사람이 많이 살던 곳과는 워낙 멀고 고산에 위치했고 

화폐가 없던 케추아족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음

 

은광 노동력 확보에 문제가 있었음

40도가 넘는 먼지가 자욱한 곳에서 날마다 강제노동을 하는 거임

잉카 원주민은 보호해줄 장비 없이 무릎 걸음으로 지하도를 파고 들어가야 함

파낸 돌이 25KG이 되면 배낭에 넣고 나무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감

이걸 하루에 25번씩 반복 해야함

 

세로니코 갱도에 천장이나 벽은 무너지기 일수여서 그 상태로 매장되기도 함. 800만명 정도가 그렇게 죽음.

목요일 정오에만 따뜻한 음식 먹으려고 밖으로 나옴, 이때만 햇빛을 볼 수 있음

그래서 건강한 사람도 제련과정에서의 수은중독이나 채굴하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1년만에 다 죽음

그 광산에 일을 하러 가면 마을에서 미리 장례식을 치뤄줌

그래서 마추피추같은 도시도 강제노역을 피하려고 숨어든 사람들이 만든 비밀도시라는 설도 있음

 

이런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고 카리브해 지역 노예시장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옴

아프리카 서부해안 지역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나중에는 원주민 대신 은을 캐면서 죽어감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들어온 1492년부터 100년동안 원주민의 90%가 사라짐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강제노역 외에도 원주민은 스페인이 휘두른 칼과 총에 죽어갔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상대로 가공할 폭력과 대량학살을 목격하고

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처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다수읭 책을 집필함

그들의 만행은 인디언을 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서 시신을 토막내기 일수였다.

사람의 배를 단칼에 관통할 수 있는지 내기 하거나 단칼에 목이 베어지는지 알아보는 내기를 하기도 함

3개월 동안 이렇게 살해된 어린 아이 숫자만 6000명

절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고, 살아남은 사람도 포토시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피신을 함


스페인 왕실은 직접 은광을 경영할 수 없었음

너무 멀고 항해 도중 올 수 있는 위험을 피하려고 유럽에서 건너간 식민지 지배층에게 은광 경영권을 줌

대신 그 생산량의 1/5을 세금으로 걷음, 이를 킨토세라고 함

세금을 받는 대신 부여하는 권한, 노동력을 본인들이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거임

은광에서 매년 사람들이 15000명 정도가 죽어서 매년 15000명의 새로운 광부가 필요했음

스페인 국왕은 신대륙 정복자들에게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출하여 사용할 수 있는 레파르티미엔토 제도를 실시함

은광 지역에서는 마을마다 일정 수의 원주민을 착출하여 은광에서 일하게 함

 

노예가 아니고 식민이라고 하여 임금을 줌

포토시 은광에 동원된 인력들에게 화폐를 줬는데, 이 사람들은 화폐가 초면이었음

 

이걸 미타라고 불렀고, 미타로 코카잎을 삼

원주민들은 코카 잎을 씹으면서 일함 

코카잎을 씹으면 알칼로이드가 나오고 

이게 허기증 갈증 피로를 풀어줌

 

코카 나무는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키작은 광목

그리고 재례의식에서도 사용했는데, 이게 상품이 되어버림

 

화폐가 생기고 상품이 돼서 

추위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코카를 사게됨

공동체의 상징물이었던게 고된 노동의 상징물이 되어버림

 

 


포토시 은의 세계사적 의미

 

포토시의 은은 약 200년동안 스페인의 소유가 됨

스페인 사람들의 소유가 된 은은 유럽이나 아시아로부터 물건을 사들이면 지불하는 화폐로 쓰임

제 1차 세계화의 물적 토대가 됨

 

포토시의 은은 매년 대서양을 건너서 스페인의 세비야로만 들어감

아메리카 대륙과 스페인의 무역항이 있음

세비야 성당에는 콜롬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으로 만든 십자가 등이 보존됨

스페인은 바닷가에 있는 도시가 아님

세비야를 관통하는 구과달키비르강이 있음

 

내가 세비야 여행가서 찍은 거임

세비야가 바다랑 13KM가 떨어져 있는데 이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이 됨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에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뱃짐도 다 세비야에 결집해서 출발

신대륙에서 온 물건들은 또 다 세비야로 들어옴,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를 실은 배가 들어오면 황금탑에 저장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비야로 올때 배가 한 척씩 오는 게 아님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박의 수는 매번 달랐지만 60~100척 정도가 함께다님 이걸 선단(플리트)이라고 함

포토시에서 채굴한 걸 2개월 간 대서양을 횡단해서 가져가는데 금은보화가 있으니 해적선이 있었음

카리브 해협을 지나가서 카리브해적이 유명한거임 - 스페인의 보물선을 노림

한번에 가서 검사하고 세금 징수하는데 왕실이 이걸 다 관리함

 

 

 

새로운 제련법이 발달한 1570년부터 은 매장량이 줄어든 1600년대 중반인 백년동안 가장 많이 유입됨

20년동안 약 500만 KG이 유입됨

 

세계 경제의 출현

이 막댇한 은은 세계 시장에서 교역을 촉발함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마젤란이 계속 서쪽으로 나가서 태평양 항로를 개척할 당시의 왕임

포토시에서 들어온 은을 주고 아시아에서 귀한 후추, 도자기, 비단을 구입

옛날에는 후추가 너무 귀해서 후추를 얼만큼 범벅해서 먹느냐가 부와 귀족의 척도였음

 

그렇게 포토시의 은이 명나라로 흘러들어감

당시 중국은 은 수요가 많았음 

14세기 말에 화폐를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지폐를 믿지 못해서 사용 안함

그리고 명나라 정부가 지폐를 과도하게 발행해서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침

 

암암리에 상거래하거나 뭘 하든 지폐가 아닌 동이나 은 대체 통화가 통용됨

그래서 계속해서 은이 최적의 화폐로서 역할을 해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은의 수요가 증가함

결국 명나라도 세금의 원활한 징수를 위해 1500년대에 은을 단일화폐로 사용함

그래서 은 사용량이 급증함

 

그렇게 1차 세계화가 시작됨